사립유치원에 이어 노인요양기관들의 불법·비리가 도마 위에 오른 가운데 올해부터 장기요양기관에 적용되고 있는 강화된 재무회계기준을 재가장기요양기관에 대해서는 철회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노인장기요양보험법 개정안’을 놓고 재가장기요양기관 운영자들과 요양서비스노조의 갈등이 극에 달하고 있다.
정부는 노인장기요양기관들의 불법 운영을 막기 위해 올해 5월부터 노인장기요양기관도 비영리기관인 사회복지시설에 준하는 재무회계기준을 따르도록 조치한 바 있다.
이 제도가 시행된 직후인 7월, 더불어민주당 오제세 의원은 요양시설이 아닌 재가장기요양기관에 대해서는 보건복지부의 재무회계기준을 일반 기업처럼 상법상 회계원칙 수준으로 대폭 완화하는 ‘노인장기요양보험법 개정안’을 내놨다. 이른바 ‘오제세법’이다.
재가장기요양기관 운영자 단체는 오제세법을 크게 환영한다. 반면, 요양보호사 등 요양서비스노조는 장기요양기관들의 불법·비리 운영을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마저 없애려 한다면서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장기요양기관 비린 만연, 별도 재무·회계 규칙 시행
노인장기요양보험법은 요양시설 입소 외에 요양보호사를 집으로 불러 목욕, 요양, 간호, 단기보호 서비스를 받는 재가급여의 경우도 노인장기요양보험료를 통해 마련된 재원으로 노인 1인당 85%의 비용을 대주고 있다. 본인부담은 15%다. 재가장기요양기관에는 요양시설보다 더 많은 비율의 국민 세금과도 같은 보조금이 지급되고 있다.
하지만 2008년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행된 이후 장기요양기관들의 불법·비리 운영이 끊이지 않았다. 보험료를 조금이라도 더 타내기 위해 불법운영이 만연하면서 최근 요양기관의 약 94%가 비리로 적발됐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사립유치원과 함께 장기요양기관들이 도마에 오른 이유다.
이에 따라 정부는 올해 초 보건복지부령으로 장기요양기관에 적용하는 별도의 재무·회계 규칙을 마련해 5월부터 시행하고 있다.
현행 장기요양기관 재무·회계 규칙은 모든 장기요양기관이 사회복지시설과 동일하게 사회보장정보시스템을 이용하도록 하고 있다. 이 규칙은 세입세출명세서, 임직원 보수표, 사업비 명세서 등은 물론, 심지어 후원금 수입과 사용결과까지 사회보장정보시스템에 실시간 입력하는 방법으로 자치단체장에 보고하도록 돼 있어 운영자가 임의로 돈을 빼돌리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오제세법’, 현행 ‘장기요양기관 재무·회계 규칙’ 무력화
현행 장기요양기관 재무·회계 규칙이 시행되고 2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더불어민주당 오제세 의원이 이례적인 법안을 내놨다. 보건복지부령으로 시행된 장기요양기관 재무·회계 규칙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노인장기요양보험법 개정안’이다.
이 개정안은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지급받지 않고 민간이 설치·운영하는 기관의 경우에도 그 규모나 국고보조금 등의 지원 여부 등과 상관없이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하는 장기요양기관 재무·회계기준을 따르도록 하는 것은 과도한 제약”이라고 법안 개정 이유를 밝히고 있다.
따라서, 요양기관의 규모, 국고보조금 지원여부나 금액을 고려해 하여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재가장기요양기관을 설치·운영하는 경우 상법에 따른 회계의 원칙을 준수하도록 해 부담을 완화한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이 개정안은, 불법·비리의 온상으로 지탄을 받고 있는 장기요양기관들에 족쇄를 채우자마자 풀어주는 것이어서 개정안을 발의한 배경에 많은 의혹이 쏟아지고 있다.
특히, 개정안에는 요양시설을 제외하고 재가장기요양기관에 대해서만 족쇄를 풀어주는 것으로 돼 있지만, 법안 심의과정에서 ‘재가’만 빼면 요양시설도 해당되는 사안이어서 첨예한 논란이 되고 있다.
‘오제세법’ 토론회서 요양서비스노조와 충돌
오제세법은 이 법안이 나온 지난 7월부터 논란을 일으켰지만 이슈화되지는 않았다. 최근 사립유치원과 함께 요양기관의 불법·비리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오제세 의원이 11월 14일 주최한 국회 토론회가 기폭제가 됐다.
오제세 의원은 이날 오전 국회의원회관에서 ‘민간장기요양기관의 장기발전을 위한 제도개선’이란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회는 시작 전부터 충돌을 빚었다. 법안에 반대하는 요양서비스노조 조합원들이 토론장에 입장하자 법안을 찬성하는 요양기관 관계자들이 퇴장을 요구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요양서비스노조는 “우리도 요양기관 당사자로 토론회에 참석했는데 일부 참석자들이 ‘나가라’며 퇴실을 요구했다”는 입장이다.
이후 요양서비스노조 관계자들이 법안 통과를 반대하는 현수막을 들고 “오제세법 반대한다”는 구호를 외쳤다. 그러자 법안을 찬성하는 다수의 요양기관 관계자들이 “오제세법 찬성한다”는 구호로 맞받아치며 애국가를 제창하기도 했다.
요양기관 관계자들이 요양서비스노조 조합원을 토론장에서 쫓아내는 과정에서 격심한 몸싸움이 일어났다. 결국, 이날 토론회는 요양서비스노조 조합원들을 쫓아내고 예정대로 진행됐다.
오제세 의원, “요양기관들 어려움 직면”
오제세 의원이 주최한 이날 토론회는 요양기관에 적용되고 있는 현행 장기요양기관 재무·회계 규칙을 없애고, 일반 기업처럼 상법상 회계기준을 적용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날 토론회의 성격을 대변하는 발제도 ‘비영리 재무회계규칙 대체입법안의 타당성 검증과 전략적 추진방향’이었다. 한마디로 장기요양기관 재무·회계 규칙을 대체하는 오제세법이 왜 타당한지 밝히고, 앞으로 어떻게 추진해야 하는지 논의하는 토론회였다.
토론회에 참석한 오제세 의원은 인사말에서 “최근 민간장기요양기관에 대한 재무회계규칙 개정으로 인해 민간요양기관들이 현장의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면서 “민간에서 사유재산 시설투자에 대한 정부의 보상이 마련돼 있지 않아 장기적으로 노인장기요양제도의 성공을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밝혔다.
같은 당 박용진 의원이 사립유치원들의 비리를 바로잡겠다면서 이른바 ‘박용진3법’을 낸 것과 정반대로 오제세 의원은 요양기관들을 보호하겠다는 취지로 ‘오제세법’을 발의한 것.
요양서비스노조, “최소한의 규제 장치 없애”
전국요양서비스노조는 “오제세법이 통과되면 노인복지는 사라지고 사업만 남게 된다면서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요양서비스노조는 토론회가 열린 14일 국회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오제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장기요양기관의 비리를 보호해 주는 노인장기요양보험법 개정안을 즉각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노조는 또,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민간 요양기관 원장이 사적 이익을 위해 기관 돈을 사용해도 처벌할 수 없게 된다”고 지적했다.
노조는 이날 낸 성명에서 “재무회계규정을 상법회계로 완화한다면 비리와 횡령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장기요양기관을 최소한도로 규제할 장치마저 국가 스스로 손을 놓겠다는 것”이라고 성토했다.
이들은 또, “많은 장기요양기관들이 더 많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법망을 피해 4대보험, 연차, 퇴직금을 주지 않으려는 꼼수들이 만연하고 있다”면서, “퇴직금을 주지 않기 위해 1년이 되기 전 퇴직처리시키고, 근로시간이 월 60시간이 넘어도 연차수당, 퇴직금 등을 주지 않으려는 상황이 비일비재하다”고 폭로했다.
요양서비스노조는 “영업이익을 중심으로 하는 상법회계를 적용한다는 ‘오제세법’을 발의하는 것이 정말 타당한 것인가” 반문하면서, “오제세법이 통과되면 제대로 된 노인복지는 사라지고, 노인복지가 이익을 남기는 사업으로만 남게 된다”고 우려했다.
노인장기요양보험을 통해 국민의 혈세가 투입되고 있는 장기요양기관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전면감사를 시행해 부정·비리사범을 엄중히 처벌해야 한다는 국민여론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오제세법’이 과연 국회를 통과할지 지켜볼 일이다.